"아가씨, 그 돈으로는 여기서 아무것도 못 사. 아니, 어느 음식점을 가도 안 될걸?"
실루엣은 제 손바닥 위에 얹어진 금속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둥글고 납작한 금속 덩어리 두어 개가 처량하게 누워있었다.
"…이거, 의뢰를 하고 받았어."
"아아…. 그거 코 떼인 거야. 말도 안 되게 값을 후려치는 놈들이 아직도 있었구만. 저기 저잣거리로 나가면 빵 한 덩어리 정돈 살 수 있을 거야."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상인은 오도카니 서있는 실루엣을 뒤로 하고 가게 안으로 냉큼 들어갔다.
"……."
얻은 것은 자신의 손바닥만한 크기의 빵이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동그란 덩어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한입 작게 베어물었다. 텁텁하고 아무 맛도 안 느껴지는 것이 일품이다. 몇 번을 우물거리고 나면 무언갈 쥐기는 했었냐는 듯 손아귀가 텅 비었다. 6시간을 소모한 노동의 결과가 1분 만에 사라진 셈이다. 다행스럽게도 울다하는 춥지 않다. 길바닥에 앉아있어도 얼어죽을 염려가 없다는 점이 그나마의 위안이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실루엣은 돌을 깎아 붙인 거리 위를 터덜터덜 걸어갔다. 자고 일어났더니 밤새 배고 있었던 가방이 또 사라진 탓이다. 가진 것은 싸울 수 있는 몸뚱이 뿐이니, 모험가 전단을 확인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피곤하다.'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느낀 감상은 그것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인간이라는 것에게 시달렸는가. 제 값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것은 기본이요, 물건을 사겠다 하면 냅다 덤터기를 씌우니 근래 들어 가장 잦은 피해를 본 자는 실루엣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략이 판치는 모래와 바위의 도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모험가는 그저 노리기 좋은 먹잇감일 뿐이다.
실루엣은 지친 기색으로 사람들 틈에 껴 눈에 띄는 전단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의 미숙한 공용어 실력으로는 간단한 문장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 정도도 그에게 있어서는 큰 발전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공용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전투가 아닌 언어를 제일 먼저 익혀야 했다. 말이 통하질 않으니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검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쁘게 굴러가며 종이 위의 잉크를 훑는다. 조건에 맞춰 하나씩 고르고 있자니 귀찮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는 바람에 기껏 모았던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실루엣은 자신을 방해한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밝은 피부를 가진 금발의 휴런족 남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가 요즘 새로 활약하고 있다는 모험가가 맞지?"
"…누구야?"
남자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양손을 위로 했다.
"나는 타울프. 광부야. 의뢰를 맡길 모험가를 찾고 있어. 기왕이면 실력이 좋은 사람에게 맡기고 싶은데…. 네 소문을 들었거든. 어때? 내 의뢰를 받아주지 않겠어?"
"…모모디가 되도록, 모험가 길드를 통해 의뢰를 받으라고 했는데…."
"꼭 그러지 않아도 돼. 게다가 너 정도면 이제 초보도 아니잖아? 얼마든지 이렇게 의뢰를 받아도 된다는 말씀. 문제가 될 건 아무것도 없어."
실루엣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의 의뢰는 대부분 모험가 길드를 통해 받은 것이었다. 초보 모험가는 그렇게 하는 편이 좋다는 말을 모모디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절차는 모르지만 터무니 없는 의뢰는 길드 쪽에서 걸러주는 듯했다. 심지어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한 의뢰는 거진 길드 밖에서 받은 것이었으니, 이 제안이 탐탁치 않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을 본 남자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걱정 마. 제대로 계약서도 쓸 거니까. 보수도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
실루엣은 남자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고 눈을 좁혔다. 그의 말마따나 종이에는 식당에서 몇 차례 끼니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적혀져 있었다. 해야하는 일은 마물 퇴치. 그거라면 어렵지 않다. 그 외에 문장은 어려워서 읽지 못하겠지만…. 실루엣의 시선이 다시금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웃는 낯으로 모험가를 가만히 기다려주고 있었다. 실루엣은 고민 끝에 그를 믿기로 결정했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실루엣이라는 이름 석자가 적힌 계약서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지금 바로 의뢰를 부탁할게. 우선 검은솔 정류소로 가자."
남자가 데려간 곳은 중부 다날란에 위치한 냇가였다. 암석 지반에는 꽤 커다란 동굴이 뚫려있었고, 입구 앞에 서있던 엘레젠 남성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오셨군요. 자, 모험가님. 저 안을 봐주십시오…."
실루엣이 동굴 안을 들여다보면 선홍색 광석이 가득 들어찬 상자 여러 개가 보였다.
"저건 타울프 씨가 저희 상회에 납품하기로 한 광석입니다…. 하지만 스프리건이 떼로 몰려와 공격하는 바람에 빼앗겨버렸지요."
"저 마물들을 쫓아내고 광석을 되찾아줘. 저걸 납품하지 못하면 큰 문제가 생기거든. 부탁할게."
실루엣은 고개를 끄덕었다. 생각보다 간단한 의뢰니 금방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간 실루엣은 익숙하게 환술봉을 들어올렸고, 자신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쉬이 마물을 물리칠 수 있었다. 화려한 빛이 점멸하며 사그라들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제 마지막으로 상자를 상인에게 운반하기만 하면 된다. 그럴 터인데…. 실루엣은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눈을 감았다 떴다. 상자 안의 광석이 모두 회색으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채로 상자를 내려다보고 있자 두 사람이 뛰어들어왔다. 광부는 거칠게 상자를 잡고 이리저리 살피며 외쳤다.
"아니…. 이건…. 전부 못쓰게 되어버렸잖아!"
"어…?"
"이봐, 어떻게 할 거야? 이래서는 광석의 가치가 없어! 전부 쓸모가 없어졌다고!"
"예, 저희도 이런 물건은 사용할 수가 없군요."
실루엣은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나는 전투만 했을 뿐이고 광석에는 손대지 않았어. 이건 내 책임이…."
"그럼 저 멀리 있던 우리 책임이라는 거야? 누가 봐도 네 책임이 맞잖아!"
"모험가님. 아무래도 당신이 책임을 져주셔야겠는데요."
"…어쩔 수 없지. 세 배로 변상해줘야겠어."
"세 배라니, 그런 억지를…!"
의뢰인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는 품에서 낯익은 종이를 꺼내들고는 보란듯이 내밀었다. 검지 손가락이 중간의 구절을 가리킨다.
"보라고. 여기 써져있어. '만일 상품을 훼손할 경우 상품가의 세 배로 변상한다.' 저 광석은 품질이 아주 뛰어난 거라 말이지…. 전부 합쳐서 이만큼 내줘야겠어."
"…그, 그런 엄청난 돈은 없는데…."
"없어?"
광부의 얼굴이 급격히 가라앉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상인이 어깨를 한번 크게 으쓱이고는 입을 연다. 명백히 시혜적인, 아니, 계산된 태도였다.
"그렇다면 상회에서 일하는 수밖에 없군요. 모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말입니다!"
"……."
아, 처음부터 둘이 한통속이구나.
깊은 숨이 입가로 들어갔다. 이만큼이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던 적은 없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전부 빼앗으려 들었다. 빼앗고 나면 그 다음은 이용하려 들었다. 왜 알면서도 그들을 믿어주려고 했던 걸까? 가슴 속 깊은 곳이 검게 문질러지는 느낌에 숨을 내뱉는 것을 잊었다. 이 감각은 그립고, 익숙하고, 더는 느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이 내뱉는 말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실루엣은 지금 눈앞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다. 이 증오와 슬픔을 해소하면 가슴 속에 응어리진 무언가 또한 녹아 사라질 것만 같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틀림없다. 자신은 태어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것이다….
손끝까지 검게 잠기려는 그 순간, 기어코 운명의 장난이 찾아왔다.
"더는 못봐주겠군."
흐린 시야에 새하얀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는 옆을 지나쳐 남자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눈뜨고 볼 수 없는 한심한 작태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너희들은 변하지를 않는군…. 불완전한 것이란 언제까지고 이럴 테지…."
잠기는 정신을 꿰뚫고 들어오는 것은 적나라한 경멸이었다. 그것이 저 둘을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으나,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남자를 보자마자 느낀 감정은 '당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움'. 그리고 '안정감'. 한 단어로 묘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감정이 깊은 곳에서 넘실거렸다. 손을 뻗었던가? 아니면 입을 열었나? 실루엣은 그제서야 두 인간이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광석은 에테르에 변질되기 쉬운 성질을 갖고 있어. 광석을 관리하는 자가 이걸 모를 리가 없다는 거다. 얼마나 어리석게 보았으면."
남자는 혀를 찼다. 이윽고 큰 소리와 함께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들이 사라졌다.
"내가 너에게 이런 식으로 관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더는 너를 신경쓰지 않겠다."
흰 옷을 입은 사내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실루엣은 그가 떠나려고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팔을 뻗었다. 잠깐. 가지 마. 나는 너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단 말이야. 절박함은 냉정함에 내쳐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자신만이 홀로 남아있었다.
그 뒤로 실루엣은 흰 남자를 찾아다녔다. 그 정체모를 인물은 자신의 은인이자 알 수 없는 감정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꿈결 속의 사람인 것처럼 그 어디에서도 흔적 하나 찾아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헛것을 보았노라 생각하게 될 무렵, 아씨엔과 만났다.